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여수·순천 10.19 사건 (문단 편집) ==== 기타 평가 ==== [[해방전후사의 인식]]에 기고한 학자 황남준은 기고글에는[* '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'(해방전후사의 인식3, 한길사,1987)] 여순사건이 쿠데타라기보다는 무장폭동에 가깝고 그 파급 과정에서 남로당이 가담해 반란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평가했으나, 동년(1987년)에 투고한 연세 제25호에는 '항쟁'이란 용어도 사용하였다.[* '여순항쟁과 반공국가의 수립'] 항쟁과 폭동이란 용어를 동시에 사용한 경우. 종군기자 출신의 한국전쟁 전문가 [[브루스 커밍스]]는 14연대 반란을 연대 하사관 그룹에 의해 "엉터리"로, "때이르게" 시작된 반란이며 이딴 걸 왜 비중 있게 다루냐고 의문시했다.[* 김득중, 麗順事件 李承晩 反共體制 과 의 구축, 11페이지 참고] 상술된 것처럼 [[문재인 정부]] 시기인 [[2021년]] 여야 합의로 [[21대 국회]]에서 여수순천 사건 특별법을 제정하였다. 이 법률은 여순사건을 여순반란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다수가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였고, 민간인 피해를 규명하고 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. 이후 순천의 팔마종합운동장에 있던 기존의 '여순사건위령탑'은 '여순항쟁탑'으로 바뀌었고, 순천 버스터미널 인근에는 '여순항쟁 역사관'이 문을 열었으며, [[순천대]]에서는 '여순항쟁 역사화전'을 개최했다.[[http://weekly.chosun.com/client/news/viw.asp?ctcd=C03&nNewsNumb=002633100003|‘여순사건’ 특별법 이끈 소병철 의원의 부친은 당시 경찰]] >김태선 당시 수도경찰청장의 여순사건 회고 > >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 총살장서 구사일생 > >(전략) 경찰관들의 수난이 얼마나 처참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당시 여수 철도경찰 지대장 소석우 경위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.(소씨는 현재 순천시 인제동 55의11에서 남산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다.) > >반군들이 여수시를 습격한 19일 밤 소 경위는 부하 18명을 이끌고 시내로 나가 반군에게 대항했지만 순식간에 13명이 피살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나머지 5명에게 피신할 것을 명령하고 철경 사무실로 달려갔다. 주요 서류를 정리해 버리기 위해서였다.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벌써 반군들은 철경 사무실 쪽으로 벌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. 소 경위는 숨을 곳을 찾다가 숙직실 벽장 문을 열어젖혔다. 비좁은 벽장 속에는 이미 3명의 철경들이 숨어 있어 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. > >되돌아서 나오던 소 경위는 사무실 뒷문으로 뛰어든 반군들에게 잡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승으로 두 손을 결박당했다. 소 경위는 반군에게 끌려가면서 “나는 경찰관이 된 지 한 달밖에 안 된다.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”고 애원했다. 마침 소 경위의 주머니에는 2만7000원이 들어 있었다. 소 경위는 7000원을 꺼내 옆에 앉은 반군에게 쥐여주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. 돈을 받은 반군이 운전하는 동료를 보고 “이 자식 살려줄까?” 하고 물었다. 소 경위는 다시 만원을 꺼내 그들에게 주면서 사정했다. > >반군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를 집까지 태워다주고 돌아갔다. 죽을 뻔했다 살아난 소 경위는 그대로 있다가는 또 반군들에게 잡힐 것 같아 여수를 벗어나기로 하고 밤을 틈타 떠났다. 그는 약 20리 떨어진 미평(여수시 미평동)까지 가서 또 반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. 소 경위는 “어린아이 병이 위독해 약을 지으러 간다”고 둘러댔다. 반군들은 이 말을 곧이들었으나 지방폭도 중에서 얼굴을 아는 자가 소 경위를 가리키며 “저놈은 여수 철도경찰대장”이라고 소리쳤다. > >반군들은 소 경위를 미평 주재소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시작했다. 반군들은 “철경으로 있으면서 열차 안에서 유부녀 몇 명을 겁탈했느냐”면서 당치도 않은 신문을 했다.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자 반군들은 장작으로 소 경위를 마구 두들겨 팼다. 고문에 못 이긴 소 경위가 “세 번 했다”고 거짓 자백하자 이번에는 “쌀을 몇백 가마 훔쳐 먹었느냐”고 다그쳤다. “100〜200가마 훔쳐 먹었다”고 아무렇게나 대답하자 반군들은 “그럼 됐다”면서 소 경위를 유치장으로 밀어넣었다. > >소 경위는 깜깜한 유치장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. 손 짚은 곳이 끈적끈적했다. 오물인 줄 알고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. 피비린내가 코를 울컥 찔렀다. 유치장 바닥은 선혈로 가득했으며 칼에 찔려 죽은 10여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. 모두 학살당한 경찰관들이었다. 어둠 속에 눈이 익자 시체 가운데서 한 명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.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는 철경 사무실 벽장에 숨었던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. 그는 어깨가 반쯤 잘려 팔 하나가 밀려 나간 무참한 꼴이었다. 그는 소 경위를 알아보고 “주임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. 주임님은 칼에 맞지 않으셨습니까” 하고 모기 소리 같은 목소리로 말하다 눈을 감고 말았다. > >새벽이 되자 반군들은 소 경위를 끌어내 여수경찰서로 데려갔다. 여수경찰서에서도 총살당한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. 반군들은 밤 9시쯤 되자 유치장에 갇혔던 10여명을 불러내 경찰서 뜰에다 나란히 세워 놓고 기관총을 난사했다. 나란히 섰던 경찰관들이 낙엽처럼 쓰러졌다. 소 경위도 물론 쓰러졌다.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소 경위는 추운 기를 느꼈다. 그는 “내가 틀림없이 총살당했는데 웬일인가” 하고 몸을 일으켜 보았다. 아무데도 상한 데가 없었다. > >살았다고 생각한 소 경위는 여수 뒷산으로 허둥지둥 기어 올라갔다. 죽을힘을 다해 소라(여수시 소라면)까지 다다랐으나 날이 밝자 또 반군에게 잡히는 몸이 됐다. 반군들은 피투성이의 소 경위를 보자 처형장에서 도망 온 것을 당장 알아차리고 총대로 소 경위의 등어리를 수없이 펑펑 내리쳐 반죽음이 된 그를 소라 유치장으로 끌어넣었다. 유치장에는 소라 지서장과 여수경찰서 기마대장이 먼저 끌려 와 쓰러져 있었다. 그들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져 보기조차 처참한 모습이었다. 잠시 후 그들은 총살장으로 또 끌려 갔다. 총살장은 공동묘지였다. 공동묘지에는 발가벗긴 채 학살된 시체들이 즐비하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.(후략) > >자료: 1974년 11월 21일, 중앙일보 게재 ‘김태선 회고록’[* 출처 : [[http://weekly.chosun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6502|주간조선]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